유스티누스 1세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유스티누스 1세는 6세기 동로마 제국의 황제이다. 마케도니아 출신의 농부였던 그는 군 복무를 통해 성장하여 황실 근위대 대장까지 올랐고, 518년 아나스타시우스 1세의 후계자로 즉위했다. 조카인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도움을 받아 통치했으며, 로마 교회와의 관계 회복에 힘썼다. 유스티누스 1세는 아카키우스 분열로 인한 동서 교회의 분열을 해결하고, 종교적 색채를 강화하는 정책을 펼쳤다. 말년에는 유스티니아누스 1세를 공동 황제로 임명하고 사망했으며, 그의 사후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제위를 계승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527년 사망 - 이차돈
이차돈은 신라 법흥왕 때 불교 공인을 위해 순교한 인물로, 자신의 죽음을 통해 왕의 위엄을 세우고 신하들의 반대를 잠재워 신라 불교의 초석을 다지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 527년 사망 - 역도원
역도원은 북위 시대의 관료이자 학자로, 주현 설치와 변방 방비 재구축에 참여하고 반란 진압에 공을 세웠으나 엄격한 법 적용으로 옹주 자사 소보은의 반란 계획 조사 중 피살되었으며, 학문에도 능통하여 여러 책에 주석을 달고 문장을 저술하기도 했다. - 450년 출생 - 교황 호르미스다
교황 호르미스다는 6세기 초에 재위했으며 아들 실베리오를 둔 인물로, 아카키우스 분열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요한 1세와의 협상을 통해 519년 로마 교회와의 친교를 회복시켰다. - 450년 출생 - 게이타이 천황
게이타이 천황은 일본의 26대 천황으로, 《고사기》와 《일본서기》의 기록에 차이가 있으며, 부레쓰 천황 사후 호족들의 추대로 즉위하여 야마토 왕권 강화와 대외 관계에 힘썼고 그의 혈통이 이후 천황 계보로 이어진다고 전해진다. - 6세기 동로마 황제 - 유스티니아누스 1세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527년부터 38년간 동로마 제국을 통치하며 로마법 대전 편찬,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 건설 등의 업적을 남겼고 벨리사리우스 장군을 통한 정복 전쟁, 교회 정책 추진 등으로 제국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결코 잠들지 않는 황제"였다. - 6세기 동로마 황제 - 아나스타시우스 1세
아나스타시우스 1세는 491년부터 518년까지 동로마 제국을 통치한 황제로서, 검소한 통치와 대외 위협 대응, 화폐 및 행정 개혁을 추진했으나 종교적 갈등과 반란으로 불안정한 통치를 겪다가 후계자를 정하지 못하고 사망했다.
유스티누스 1세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 | |
칭호 | Imperator Caesar Flavius Iustinus Augustus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플라비우스 유스티누스 아우구스투스) |
출생명 | 이우스티누스 |
별칭 | 이우스티누스 트라クス (Iustinus Thrax), Ἰουστῖνος ὁ Θρᾷξ (Ioustînos ho Thrâix, 이우스티노스 호 트라익스) |
출생 | 년경 |
출생지 | 베데리아나, 동로마 제국 |
사망 | 527년 8월 1일 (77세) |
사망지 | 콘스탄티노폴리스, 동로마 제국 |
배우자 | 에우페미아 |
자녀 | 유스티니아누스 1세 (양자) |
종교 | 칼케돈 기독교 |
통치 | |
국가 | 동로마 제국 |
즉위 | 518년 7월 9일 |
대관식 | 518년 7월 10일 |
퇴위 | 527년 8월 1일 |
선임자 | 아나스타시우스 1세 |
후임자 | 유스티니아누스 1세 |
섭정 | 유스티니아누스 1세 (527년 4월 1일부터) |
섭정 유형 | 공동 황제 |
가문 | |
왕조 | 유스티니아누스 왕조 |
2. 생애
유스티누스 1세의 통치 후반기에는 동고트족과 페르시아 제국의 위협에 직면했으며, 526년 건강 상태가 나빠지자 조카 유스티니아누스를 공동 황제로 지명했다. 이듬해 8월 1일 유스티누스가 사망하자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제위를 물려받았다. 유스티누스 황제 시대에 제국은 안티오키아(시리아)의 대지진 등 재해를 겪었으며, 대외적으로는 사산 제국의 침공을 받는 등 다난한 치세였다.[26]
2. 1. 초기 생애 및 경력
마케도니아 지방의 농부 출신인 유스티누스는 10대 시절에 친구 두 명과 함께 야만족의 침입을 피해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도망쳤고 그 곳에서 군대에 입대했다.[7] 군대에서 재능을 인정받아 장군까지 올랐고, 아나스타시우스 황제의 황실 근위대 대장으로 근무하였다.[7] 518년 7월 9일 전임 황제가 죽었을 때,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유일한 군대인 황실 근위대의 위력을 바탕으로 환관장 아만티우스의 음모를 뿌리치고 황제로 선출될 수 있었다.황제 아나스타시우스는 말년에 자신의 세 조카들 중에서 한 명을 제위에 앉히기 위해 궁정으로 불러들였는데, 저녁 식사에 초대하여 방석 하나에 몰래 ‘황제’라는 글자를 써서 숨겨 놓고 그 자리에 앉는 사람을 다음 황제로 내세우려고 했다. 그러나 세 조카는 아무도 그 자리에 앉지 않았고, 황제는 다음날 아침 맨 처음 자신의 침실로 들어오는 사람을 황제로 정하기로 했는데, 마침 그날 제일 먼저 황제의 침실로 들어온 사람이 바로 유스티누스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유스티누스는 싸움 밖에 할 줄 몰랐고, 철자도 몰라 미리 준비한 서판에 서명을 할 정도로 무식했다. 사실상 너무 무식해서 황제라는 지위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러나 조카인 플라비우스 페트루스 사바티우스(''Flavius Petrus Sabbatius'')의 도움으로 비교적 안정적으로 통치했고 그 조카를 양자로 삼아 후계를 맡겼다. 그 조카이자 양자가 바로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된다. 프로코피우스에 따르면 유스티누스는 거의 명목상 황제였을 뿐, 실제로 통치는 유스티니아누스가 도맡아 했다고 한다.
유스티누스는 나이수스(오늘날의 니시, 세르비아) 근처의 작은 마을 베데리아나에서 태어났다. 그는 트라코-로마 또는 일리로-로마계 혈통이었으며, 라틴어를 사용하고 기본적인 그리스어만 구사했다. 그의 누이 비질란티아는 사바티우스와 결혼하여 훗날 황제가 되는 페트루스 사바티우스 유스티니아누스를 낳았다.
젊은 시절, 유스티누스는 두 명의 동료와 함께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다르다니아를 떠났다.[7]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피난처를 찾은 그들은 낡은 옷과 빵 한 자루 외에는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7] 그곳에 도착했을 당시 문맹이었던 유스티누스는 새로 창설된 궁궐 근위대인 ''엑스큐비토르''에 입대했다. 그는 여러 직책을 수행하며 이사우리아인과 사산 페르시아인에 맞서 싸웠고, 용맹함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황제 아나스타시우스 1세 치하에서 궁궐 근위대 사령관인 ''코메스 엑스큐비토룸''의 영향력 있는 자리에 오르기까지, 그는 트리뷴, ''코메스'', 원로원 의원 등을 역임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루피치나와 결혼했다. 프로코피우스에 따르면, 루피치나는 유스티누스의 결혼 전 첩이었던 야만인 노예였다.[8]
2. 2. 황제 즉위
마케도니아 지방의 농부 출신인 유스티누스는 10대 시절에 친구 두 명과 함께 야만족의 침입을 피해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도망쳤고 그 곳에서 군대에 입대했다. 군대에서 재능을 인정받아 장군까지 올랐고 나중에 황제 아나스타시우스의 황실 근위대 대장으로 근무하였다.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유일한 군대인 황실 근위대의 위력을 바탕으로 518년 7월 9일 전임 황제가 죽었을 때 환관장 아만티우스의 음모를 뿌리치고 황제로 선출될 수 있었다.[9]아나스타시우스 황제는 말년에 자신의 세 조카들 중에서 한 명을 제위에 앉히기 위해 궁정으로 불러들였는데 저녁 식사에 초대하여 방석 하나에 몰래 ‘황제’라는 글자를 써서 숨겨 놓고 그 자리에 앉는 사람을 다음 황제로 내세우려고 했다. 그러나 막상 세 조카는 아무도 그 자리에 앉지 않았기 때문에 황제는 다음날 아침 맨 처음 자신의 침실로 들어오는 사람을 황제로 정하기로 했는데 마침 그날 제일 먼저 황제의 침실로 들어온 사람이 바로 유스티누스였다.
판노니아 속주의 나이수스(현재의 세르비아 니시) 인근의 베데리아나 출신으로, 프라에토리아니에 입대 후 해방 노예 출신으로 알려진 Euphemia|에우페미아영어 (520년경 사망)와 결혼했다. 이후 착실하게 군 경력을 쌓아 장군의 지위에 올랐다.
선제 아나스타시우스 1세에게는 후계자가 없었고, 후계자를 지명하지 않은 채 518년, 86세~8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이 때문에 원로원은 협의 끝에 68세의 노장군 유스티누스를 새로운 황제로 선출했다. 유스티누스는 조카이자 양자인 유스티니아누스의 큰 도움을 받아 신제위에 즉위했다.
유스티누스의 아내는 유페미아라는 이름으로 황후가 되었다. 이 이름은 아마도 존경심 때문에 선택되었을 것이다.[8] 원래의 유페미아는 디오클레티아누스 박해 시대의 기독교 순교자였다. 그녀는 칼케돈의 지역 성인이었으며, 칼케돈 공의회 (451)는 그녀의 이름을 따서 봉헌된 대성당에서 열렸다.[12] 이 이름의 선택은 유스티누스와 루피키나가 독실한 칼케돈 기독교 신자임을 보여주는 초기 징후였다.[8]
3. 통치
유스티누스 1세는 제국 국경에 있는 속국을 육성하려고 노력했으며, 통치 말기까지는 심각한 전쟁을 피했다.[18]
497년 아나스타시우스 1세는 테오도리크, 동고트 이탈리아 왕과 아나스타시우스의 대리인으로서 이탈리아를 통치하는 것에 동의했다. 이것은 이탈리아를 명목상 제국의 일부로 유지하고 잠재적으로 위험한 이웃을 중립화했다. 동고트족은 이탈리아에서 소수의 귀족이었고 콘스탄티노플의 축복은 다수의 인구가 그들의 통치에 순응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처음에는 관계가 우호적이었다. 테오도리크의 사위 유타릭은 519년 콘스탄티노플에서 집정관으로 임명되었고 테오도리크의 상속자로 확인되었다. 유타릭은 522년에 사망했고, 이때 유스티누스의 정책은, 아마도 유스티니아누스의 영향으로 인해, 더 반 아리안주의적이 되었다. 526년 테오도리크가 사망하면서 유타릭의 열 살 된 아들 아탈라릭이 왕위 계승자가 되었다.[20]
인접 국가와 관련한 많은 이니셔티브는 종교적 동기에 기초했으며, 유스티누스 통치 말기에 유스티니아누스가 더 많은 권력을 잡으면서 일반적으로 개발되었다. 악숨의 칼레브 1세는 유스티누스에 의해 제국을 공격적으로 확장하도록 장려받았을 것이다. 동시대 연대기 작가 요한 말랄라스는 비잔틴 상인들이 힘야르의 유대인 왕에 의해 강탈당하고 살해당했다고 보고했다. 이로 인해 칼레브는 "너는 기독교 로마인 상인들을 죽였기 때문에 잘못을 저질렀다. 이는 나와 내 왕국 모두에게 손실이다"라고 주장했다.[19] 칼레브가 523년경 힘야르를 침공한 후, 유스티누스는 현재 예멘이 사산의 통제를 벗어나 동맹 기독교 국가의 통치를 받는 것을 보았다.[19]
이베리아 공국은 사산의 세력권에 있었지만 기독교 국가였다. 이베리아의 바크탕 1세는 사산과의 전쟁을 하도록 장려받았다. "열렬한 기독교인"이었던 그의 종교 정책은 "더 큰 전략적 목표의 일부"였다.[19] 오랜 투쟁 끝에 그는 패배했고, 이베리아는 522년 사산의 속주로 정복되었다.[19]
라지카는 또 다른 국경 국가였다. 그것은 기독교 국가였지만 사산 제국의 세력권에 있었다. 왕인 차트는 사산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고 싶어했다. 521년 또는 522년에 그는 콘스탄티노플로 가서 유스티누스의 손에서 왕의 휘장과 왕실 의상을 받고 복종했다. 그는 또한 세례를 받고 기독교인으로 개종했으며 비잔틴 귀족 여성 발레리아나와 결혼했다. 유스티누스 사망 직후, 사산은 강제로 통제권을 되찾으려 했지만 유스티누스의 후계자의 도움으로 격퇴되었다.
524년, 사산 황제 카바드 1세는 유스티누스에게 그의 장남보다 덜 선호되는 다른 아들들을 위해 그의 막내 아들 호스로 1세를 공식적으로 입양하여 그의 계승을 확보해 달라고 요청했다. 유스티누스는 동의했지만, 자신이 자녀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입양된 페르시아 아들이 비잔틴 왕위를 주장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야만족 관습에 따라 입양을 제안했다. 페르시아인들은 모욕을 느끼고 모든 협상을 중단했다.[20] 526년, 비잔틴은 유스티니아누스의 주도로 페르시아 아르메니아를 습격했다. 습격대는 유스티니아누스의 떠오르는 군사적 측근인 시타스와 벨리사리우스가 이끌었다. 습격은 의도를 밝히는 것 외에는 거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20]
유스티누스 1세 통치 후반기는 동고트 왕국과 사산 제국과의 긴장 고조로 특징지어진다. 526년 안티오키아가 지진으로 파괴되어 약 25만 명이 사망했다. 유스티누스는 즉각적인 구호와 재건을 시작하기 위해 충분한 자금을 도시에 보낼 수 있도록 조치했다. 대성당과 다른 많은 건물의 재건은 안티오키아의 에프라임이 감독했는데, 그는 ''comes Orientis''였으며, 그의 노력으로 유프라시우스를 대신하여 칼케돈파 안티오키아 총대주교가 되었다. 지진 이후 세워진 많은 건물들이 528년 11월에 발생한 또 다른 대규모 지진으로 파괴되었지만, 사상자는 훨씬 적었다.[22][23]
프로코피우스는 유스티누스 1세가 노년에 접어들면서 정신 능력이 치매로 쇠퇴하기 시작했다고 기록했다.[24]
3. 1. 내정
유스티누스는 아나스타시우스 황제를 지지하는 반(反)칼케돈파 등 잠재적 반대자들을 제거하여 자신의 위치를 굳혔다. 아마티우스와 테오크리투스는 즉위 9일 만에 처형되었다.[9] 유스티누스는 즉위 초, 프라이펙투스 마리누스를 포함하여 아나스타시우스 황제를 섬겼던 많은 관료들을 해고했다.[13]유스티누스는 국정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는 문맹의 직업 군인이었다.[14][15][16] 그는 신뢰할 수 있는 조언자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는데, 가장 저명한 인물은 그의 조카 플라비우스 페트루스 사바티우스였다. 유스티누스는 그를 양자로 삼아 유스티니아누스라는 이름을 부여했다.[27] 또 다른 인물은 퀘스토르 프로클루스였다.[17]
525년경, 조카 유스티니아누스는 무희 출신인 테오도라와 결혼했다. 처음에는 신분 차이 때문에 결혼할 수 없었지만, 유스티누스는 조카를 위해 황제의 이름으로 다른 계급 간의 결혼을 인정하는 법을 제정했다.[28]
3. 1. 1. 종교 정책
유스티누스 1세의 치세는 동서 기독교 교회의 분열인 아카키우스 분열 해결로 주목할 만하다. 유스티누스는 왕위에 오르자 교황 호르미스다스를 협상을 위해 콘스탄티노플로 초청했다. 훗날 황제가 될 그의 조카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개발한 정책을 수행하면서 유스티누스는 그리스도의 이중성에 대한 문제에 대해 로마의 견해를 지지했다. 519년 3월 28일, 많은 사람들이 모인 콘스탄티노플 대성당에서 망설이던 요한 2세 총대주교는 교황 호르미스다스의 형식을 받아들였고, 분열 종식은 엄숙한 의식으로 마무리되었다.[20]유스티누스는 통치 초기 3년 동안 단성론자를 박해했으며, 심지어 군인들까지도 처벌했다. 그 후 그는 더 실용적인 접근 방식을 채택했다. 523년 유스티누스는 아리우스주의에 대한 엄격한 칙령을 발표했다. 동고트족의 왕이자 이탈리아의 통치자인 테오도리크는 아리우스주의자였고, 대부분의 동고트족도 그러했다. 그는 교황 요한 1세를 콘스탄티노플로 파견했다. 요한은 매우 따뜻한 환영을 받았고, 콘스탄티노플의 사람들은 그에게 박수를 보냈으며, 유스티누스는 축하 행사를 열고 교황의 발 앞에 엎드려 교황의 손으로 재관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요한은 칙령을 뒤집는 데 성공하지 못했고, 이탈리아로 돌아가는 길에 분노한 테오도리크는 그를 감옥에 가두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사망했다.[20][21]
유스티니아누스의 격려를 다시 받은 유스티누스는 황제의 지위를 점점 더 종교적인 것으로 표현했다. 그는 "우리는 분리할 수 없는 삼위일체의 호의로 제국에 선출되었다."라고 주장했다. 칙령은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든 계획과 행동에 지속적으로 헌신한다."라는 문구로 승인되었다. 519년 또는 522년 유스티누스는 동전과 인장의 뒷면에 이교도 상징을 묘사하는 전통을 포기했다. "통치 기간 동안, 가슴 아래에 하이 거들이 있는 뒷면 여성 형상을 승리(Victory)로 식별하는 특징은 튜닉으로 대체되어, 이 형상을 천사로 식별하게 했다."[18] 이는 제국을 기독교 국가로 재천명한 매우 공개적이고 광범위한 조치였다.[18]
3. 1. 2. 유스티니아누스의 부상
마케도니아 지방의 농부 출신인 유스티누스 1세는 10대 시절 야만족의 침입을 피해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도망쳐 군에 입대했고, 장군까지 오른 뒤 황제 아나스타시우스의 황실 근위대 대장을 지냈다. 518년 전임 황제가 사망했을 때 황실 근위대의 위력을 바탕으로 황제로 선출되었다.[9]싸움 밖에 할 줄 몰랐던 그는 철자도 몰라 서명을 위해 미리 준비한 서판을 사용해야 할 정도로 무식했다.[14][15][16] 그러나 조카인 플라비우스 페트루스 사바티우스(Flavius Petrus Sabbatius)의 도움으로 비교적 안정적으로 통치했고, 그를 양자로 삼아 유스티니아누스 1세라는 이름을 부여하며 후계자로 삼았다. 역사가 프로코피우스는 유스티누스가 명목상 황제였을 뿐, 실제 통치는 유스티니아누스가 도맡아 했다고 기록했다.

삼촌의 통치 기간 동안 유스티니아누스는 ''코메스 도메스티코룸'', 황실 근위대 사령관, 파트리키 직을 역임했으며, 521년에는 집정관이 되었다. 525년, 유스티누스는 원로원 계급 구성원이 연극 배우를 포함한 하위 계급 여성과 결혼하는 것을 금지했던 법을 폐지하여, 유스티니아누스가 전직 마임 배우인 테오도라와 결혼할 수 있게 하였다.[25] 유스티누스의 건강이 나빠지자, 527년 4월 1일 유스티니아누스를 공동 황제이자 후계자로 임명했고, 같은 해 8월 1일 유스티누스가 사망하며 유스티니아누스가 단독 황제가 되었다.[25]
판노니아 속주의 나이수스(현재의 세르비아 니시) 인근 베데리아나 출신인 유스티누스 1세는 해방 노예 출신으로 알려진 Euphemia|에우페미아영어 (520년경 사망)와 결혼했다. 선제 아나스타시우스 1세가 후계자를 지명하지 않은 채 518년 사망하자, 원로원은 68세의 노장군 유스티누스를 새 황제로 선출했다. 유스티누스는 조카이자 양자인 유스티니아누스의 큰 도움을 받아 즉위했다.
유스티누스 황제 시대에 제국은 안티오키아(시리아) 대지진 등 재해를 겪었고, 사산 제국페르시아의 침공을 받는 등 어려움이 많았다.
빈농 출신으로 글을 읽고 쓸 수 없었던 유스티누스는 칙령 등에 "LEGI"(나는 읽었다,라는 라틴어의 약어)라고 뚫린 판을 준비하여 측근의 도움을 받아 서명했다고 한다.[26] 이러한 이유로 법학·신학에 조예가 깊은 조카이자 양자인 유스티니아누스가 실권을 행사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본명이 페트루스 사바티우스이며, 그의 어머니 위길란티아는 유스티누스의 누나였다. 유스티니아누스라는 이름은 유스티누스의 양자가 된 것을 의미한다.[27] 525년경, 유스티니아누스는 무희 출신인 테오도라와 결혼했다. 처음에는 신분 차이로 결혼이 어려웠으나, 유스티누스는 조카를 위해 황제의 이름으로 다른 계급 간의 결혼을 인정하는 법을 제정했다.[28]
3. 2. 외교 관계
유스티누스 1세는 제국 국경에 있는 속국을 육성하려고 노력했으며 통치 말기까지는 심각한 전쟁을 피했다.[18]497년 아나스타시우스는 테오도리크, 동고트 이탈리아 왕과 아나스타시우스의 대리인으로서 이탈리아를 통치하는 것에 동의했다. 이것은 이탈리아를 명목상 제국의 일부로 유지하고 잠재적으로 위험한 이웃을 중립화했다. 동고트족은 이탈리아에서 소수의 귀족이었고 콘스탄티노플의 축복은 다수의 인구가 그들의 통치에 순응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이탈리아 인구 대다수의 제국에 대한 감정은 엇갈렸는데, 아나스타시우스는 단성론자였고 그들은 칼케돈파였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관계가 우호적이었다. 테오도리크의 사위 유타릭은 519년 콘스탄티노플에서 집정관으로 임명되었고 테오도리크의 상속자로 확인되었다. 유타릭은 522년에 사망했고, 이때 유스티누스의 정책은, 아마도 유스티니아누스의 영향으로 인해, 더 반 아리안주의적이 되었다. 526년 테오도리크가 사망하면서 유타릭의 열 살 된 아들 아탈라릭이 왕위 계승자가 되었다.[20]
인접 국가와 관련한 많은 이니셔티브는 종교적 동기에 기초했으며, 유스티누스 통치 말기에 유스티니아누스가 더 많은 권력을 잡으면서 일반적으로 개발되었다. 악숨의 칼레브 1세는 유스티누스에 의해 제국을 공격적으로 확장하도록 장려받았을 것이다. 동시대 연대기 작가 요한 말랄라스는 비잔틴 상인들이 힘야르의 유대인 왕에 의해 강탈당하고 살해당했다고 보고했다. 이로 인해 칼레브는 "너는 기독교 로마인 상인들을 죽였기 때문에 잘못을 저질렀다. 이는 나와 내 왕국 모두에게 손실이다"라고 주장했다.[19] 칼레브가 523년경 힘야르를 침공한 후, 유스티누스는 현재 예멘이 사산의 통제를 벗어나 동맹 기독교 국가의 통치를 받는 것을 보았다.[19]
이베리아 공국은 사산의 세력권에 있었지만 기독교 국가였다. 이베리아의 바크탕 1세는 사산과의 전쟁을 하도록 장려받았다. "열렬한 기독교인"이었던 그의 종교 정책은 "더 큰 전략적 목표의 일부"였다.[19] 오랜 투쟁 끝에 그는 패배했고, 이베리아는 522년 사산의 속주로 정복되었다.[19]
라지카는 또 다른 국경 국가였다. 그것은 기독교 국가였지만 사산 제국의 세력권에 있었다. 왕인 차트는 사산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고 싶어했다. 521년 또는 522년에 그는 콘스탄티노플로 가서 유스티누스의 손에서 왕의 휘장과 왕실 의상을 받고 복종했다. 그는 또한 세례를 받고 기독교인으로 개종했으며 비잔틴 귀족 여성 발레리아나와 결혼했다. 유스티누스 사망 직후, 사산은 강제로 통제권을 되찾으려 했지만 유스티누스의 후계자의 도움으로 격퇴되었다.
524년, 사산 황제 카바드 1세는 유스티누스에게 그의 장남보다 덜 선호되는 다른 아들들을 위해 그의 막내 아들 호스로 1세를 공식적으로 입양하여 그의 계승을 확보해 달라고 요청했다. 유스티누스는 동의했지만, 자신이 자녀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입양된 페르시아 아들이 비잔틴 왕위를 주장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야만족 관습에 따라 입양을 제안했다. 페르시아인들은 모욕을 느끼고 모든 협상을 중단했다. 526년, 비잔틴은 유스티니아누스의 주도로 페르시아 아르메니아를 습격했다. 습격대는 유스티니아누스의 떠오르는 군사적 측근인 시타스와 벨리사리우스가 이끌었다. 습격은 의도를 밝히는 것 외에는 거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20]
3. 3. 말년
그의 통치 후반기는 동고트족과 페르시아 제국의 위협에 직면했으며, 526년 건강 상태가 나빠지자 조카를 공동 황제로 지명했고 이듬해 8월 1일 유스티누스가 죽었을 때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제위를 물려받게 된다.[22][23]유스티누스 1세 통치 후반기는 동고트 왕국과 사산 제국과의 긴장 고조로 특징지어진다. 526년 안티오키아가 지진으로 파괴되어 약 25만 명이 사망했다. 유스티누스는 즉각적인 구호와 재건을 시작하기 위해 충분한 자금을 도시에 보냈다. 대성당과 다른 많은 건물의 재건은 안티오키아의 에프라임이 감독했는데, 그는 ''comes Orientis''였으며, 그의 노력으로 유프라시우스를 대신하여 칼케돈파 안티오키아 총대주교가 되었다. 지진 이후 세워진 많은 건물들이 528년 11월에 발생한 또 다른 대규모 지진으로 파괴되었지만, 사상자는 훨씬 적었다.[22]
프로코피우스의 비잔틴 역사는 유스티누스 1세가 노년에 접어들면서 정신 능력이 치매로 쇠퇴하기 시작했음을 나타내며, "황제는 바보 같고 나이가 들어 환경을 웃음거리로 만들었으며, 결정 지연과 직무 수행 불능으로 비난받았다"고 적었다.[24]
4. 유산
킬리키아의 카이사레아는 525년에 유스티누스 1세를 기리기 위해 유스티노폴리스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 이름은 12세기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 토로스 1세가 수도로 삼고 아나자르부스로 이름을 바꿀 때까지 유지되었다.
참조
[1]
서적
VIII, 1
iarchive:cu319240279[...]
[2]
서적
XVII,1
https://books.google[...]
[3]
서적
De Ceremoniis
https://books.google[...]
956
[4]
서적
Constantinople and the Scenery of the Seven Churches of Asia Minor
https://books.google[...]
Fisher, Son & Co.
1839
[5]
서적
History of the Later Roman Empire: From the Death of Theodosius I to the Death of Justinian, Volume 2
https://archive.org/[...]
Dover Publications Incorporated
1958
[6]
서적
Epitome
https://archive.org/[...]
1140
[7]
서적
Secret History
[8]
웹사이트
Roman Emperors – DIR Euphemia
https://web.archive.[...]
2018-08-20
[9]
웹사이트
Roman Emperors – DIR Justinian
http://www.roman-emp[...]
2006-08-21
[10]
서적
Age of Spirituality: Late Antique and Early Christian Art, Third to Seventh Century
https://books.google[...]
Metropolitan Museum of Art
1979
[11]
웹사이트
Rodolphe Guilland, "Les Eunuques dans l'Empire Byzantin" (English)
http://www.well.com/[...]
2018-08-20
[12]
웹사이트
Greatmartyr Euphemia the All-praised
http://ocafs.oca.org[...]
2018-08-20
[13]
서적
De Magistratibus
[14]
서적
Historia Arcana
[15]
서적
Chronicle
[16]
서적
De Magistratibus
[17]
서적
Historia Arcana
[18]
웹사이트
Justin I (518–527) – Dumbarton Oaks
https://web.archive.[...]
2018-08-21
[19]
웹사이트
Mountain Constantines: The Christianization of Aksum and Iberi
http://users.clas.uf[...]
2008-03-29
[20]
웹사이트
Roman Emperors – DIR Justinian
http://www.roman-emp[...]
2018-08-20
[21]
백과사전
Pope St. John I
[22]
학술지
Natural Disasters in the Chronographia of John Malalas : Reflections on their Function --An Initial Sketch
2007
[23]
학술지
The historical earthquakes of Syria: an analysis of large and moderate earthquakes from 1365 B.C. to 1900 A.D
http://www.earth-pri[...]
2005
[24]
서적
Procopii Caesariensis opera omnia
Teubner
1962
[25]
서적
Book 17–18
https://books.google[...]
[26]
서적
秘史
京都大学学術出版会
2015
[27]
문서
The sole source for Justinian's full name
[28]
서적
Justinian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